요즘 들어 한창 추웠던 때보다 날이 풀렸음을 느낀다. 해가 떨어지면 여전히 춥지만 낮 기온이 10도 안팎을 웃도는 날도 있다. 밖에 나가 따스한 햇살을 맛보면 조금씩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봄이 오는 날인 ‘입춘(入春)’과 봄비가 내리고 싹이 튼다는 ‘우수(雨水)’가 지났다. 아직 겨울이 다 물러나지 않았지만 따스한 기운을 느끼는 날이 많아지다 보면 어느샌가 봄이 곁에 왔음을 알게 된다.
계절의 변화는 옷장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찾아온다. 우리는 새로운 계절이 오면 지난 계절의 옷을 정리하고 계절에 맞는 옷을 꺼낸다. 내 재생목록에도 변화가 온다. 날씨에 어울리는 노래를 하나하나 꺼내서 듣는다. 여름이면 야마시타 타츠로(山下達郎)의 ‘For You’를 들으며 시원한 바다를 떠올린다. 가을이면 윤종신의 ‘헤어진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를 들으며 스산한 가을을 음미한다. 겨울이면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Someday My Prince Will Come’의 따뜻한 재즈 음색이 듣고 싶다.
봄이면 윤상의 ‘이사(移徙)’를 듣는다. 풍성한 보사노바풍 음악이 푸릇푸릇 자라나는 새싹과 향긋한 꽃 내음과 무척 어울린다. 어쿠스틱 위주의 편곡이 주를 이루고 있어 산책하면 봄날을 아주 진하게 감상할 수 있다. 윤상이 만든 멜로디와 정교한 편곡, 그리고 박창학의 섬세한 가사까지 포근하면서도 짜임새를 단단하게 만든 음반이어서 봄에 꺼내 들을 때마다 즐겁다.
이 음반은 윤상의 음반 중에서 약간 이질적이다. 윤상은 전자음악을 잘 다루는 음악가로 유명하다. 단조에 기반한 서늘한 멜로디와 틈이 없이 잘 짜인 전자음악 기반의 편곡이 그의 주특기이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노래는 그러한 스타일에 기반한다. 하지만 ‘이사(移徙)’는 이와 궤를 달리한다. 제3세계 음악에 대한 큰 관심을 이전에도 여러 차례 보여주었지만 이렇게 전면에 앞세운 음반은 이 음반이 유일한 것 같다. 몇몇 곡에서 윤상의 주특기인 전자음악이 들리지만 분명히 이 음반이 중점에 둔 것은 어쿠스틱 음악이다. 전자음악이 주를 이룬 곡(2번 트랙 ‘소리’)에서도 따스함을 머금고 있다.
음반과 동명의 3번 트랙 ‘이사(移徙)’는 보사노바가 주는 즐거움을 맛보기 좋은 곡이다. 이 곡은 새로운 시작이 많은 봄과 더없이 잘 맞는다. 이사를 준비하며 그간의 짐을 정리하다가 옛 물건을 보며 지난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노래를 들으며 햇살이 드는 방에서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낡은 물건을 치우는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주인공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며 지나간 추억을 더듬는 경험은 누구나 해볼 법한 일이다. 그 순간 느껴지는 아련함, 애틋함을 아주 잘 담아내고 있다. 모두가 놓치고 지나가지만 윤상의 음악은 역시 박창학의 섬세한 가사를 통해서 더 큰 호소력을 얻는다.
이 음반의 정점은 ‘소월에게 묻기를’이다. 최근 ‘헤어질 결심’에 수록된 ‘안개’로 다시금 주목받는 정훈희가 이 노래의 보컬을 맡았다. 피아노와 현악으로 구성한 절제된 편곡에 정훈희의 서늘한 목소리를 담아내며 어느 곡에서도 맛볼 수 없는 슬픔을 표현한다. 큰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절제함으로서 더 깊은 슬픔을 자아내는 경지는 그저 경이롭다. 아직 겨울의 추위를 지우지 못한 봄바람의 서늘함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곡이다. 이 곡을 들으면 윤상이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가 중 한 명인지 알 수 있다.
윤상의 음악은 치밀한 완벽주의로 쌓은 소리와 그 안에서 은은하게 묻어 나오는 감성이 공존한다. 이는 높은 음악적 성취와 함께 대중적인 지지도 확보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따스한 감성에 조금 더 힘을 실은 ‘이사(移徙)’는 봄날에 가볍게 듣기 좋은 포근함을 그리면서도 음악적 성취를 결코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