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부터 나는 작은 스틱 모양의 Yepp MP3 플레이어를 한 손에 쥐고 다녔다. Yepp의 디자인을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U3와 U4 모델을 연달아 사고는 했다. 지금도 집 안의 서랍을 뒤져보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몇 기가바이트도 되지 않는 용량 속에 어떤 노래를 넣어 놓고 다닐지 고민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 정도 용량은 우습다.
내가 MP3 플레이어에 음악을 넣어 놓고 다니는 기준은 참 단순했다. 듣기에 좋은 노래면 어떤 노래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저장했다. 나중에 저장된 목록을 한 번 훑어보니, 8할 정도가 락 장르의 음악이었다. 사촌 형의 영향으로 마릴린 맨슨과 나인 인치 네일스, 라디오헤드를 접하고, 중학교 시절에 만난 친구의 취향에 따라 푸 파이터스와 더 크랜베리스와 만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내게 음악 취향을 공유해준 사람들의 안목이 참 대단하다고 느낀다. ‘2000년대를 대표하는 락 밴드’에 이름이 올라가는 밴드만 이렇게 내 기억에 남다니. 그때는 ‘인디 밴드’의 범주에 ‘넬’과 ‘쏜애플’이 있던 시절이고 홍대 유명 여성 싱어송라이터 반열에 ‘타루’, ‘요조’, ‘한희정’이 거론되었던 시절이다.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내 새벽 테마곡에 한 번씩 자리를 잡던 아티스트들이다.
그러나 이 쟁쟁한 새벽 테마곡의 리스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스위트피의 ‘인어의 꿈’이다. 당시 내 지인 중에서는 어느 한 사람도 이 가수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이 곡도 알지 못했다. 그 점이 이 음악을 듣는 나를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이 곡이 내 새벽 테마곡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내 새벽이 내게 주는 인상 때문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곳저곳 학원을 많이 다녔는데 이 학원들의 숙제를 마무리하려면 새벽에도 깨어있어야 했다. 12시~1시쯤 일정을 마무리하고 자리에 누우면 MP3 플레이어에 이어폰을 꽂고 ‘인어의 꿈’을 들었다. 이 곡은 기타와 하모니카, 남자의 목소리만 담겨 있다. 기교도 없고 단순한 곡이다. 아무런 꾸밈없이 남자는 자신을 인어에 빗대서 인어의 꿈을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 곡을 라디오에서 처음 듣고 새벽마다 찾아 듣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가사였다. 나도 어느 심해의 인어가 잠에서 깨어나는 기분으로 하늘을 느끼고 싶었다.
깊은 심해에 몇 만 년쯤
잠들어 있던 건 아닐까
누군가 날 깨워줬으면 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어
시간은 멈춰진 채
하늘을 느낄 수 있는 그 어딘가로
날 보내줘 저 바람 속으로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Yepp의 MP3 플레이어에서 갤럭시 플레이어로 넘어갔다가, 이제는 아이폰12 Pro 모델에 설치된 Spotify로 음악을 듣는다. 즐겨 듣던 락의 인기는 시들시들해졌다. 어디서 언뜻 본 평론 구절에 따르면 이어폰의 성능이 좋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락이 득세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어폰의 발달 때문이라니, 격세지감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R&B의 색이 더해진 부드러운 창법의 모던 락이 등장해서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데이먼스이어, 잭킹콩, 알레프의 곡이 같은 범주일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이들의 곡을 좋아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락의 실권과 함께 나의 새벽 테마곡은 공석인 채로 유지되고 있다. 찾아 듣는 곡의 스펙트럼이 내가 지나온 시간만큼 넓어졌기 때문인지, 진득하게 음악을 들을 일 자체가 줄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는 유튜브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내 새벽 테마를 유튜브에게 맡기다니, 과거에 비해서 조금 공허해진 것 같다는 감이 있다.
아 참, 스위트피는 최근에도 앨범을 발매했다.
그는 델리스파이스의 보컬 김민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