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포켓몬빵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00년대 초중반에 나와 큰 인기를 끌었던 포켓몬빵을 재출시한 제품이었다. 특히 이 제품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캐릭터와 포켓몬을 위주로 만들어져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포켓몬빵을 찾는 사람이 어찌나 많았는지 ‘우리 가게는 포켓몬빵이 없어요’라는 종이를 붙인 편의점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어릴 적 먹었던 맛이 기억나지 않아 먹어 보고 싶었는데 인기가 너무 많아서 실물을 보지도 못했다.
엄밀하게 말해 나는 포켓몬스터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때, 소위 무인편이라고 하는 시기를 직접 보고 자란 세대라고 할 수는 없다. 무인편이라고 하니 무척 생소할 텐데 간단히 말해 피카츄가 처음 등장하고 이슬이와 웅이가 함께 다니던 작품이라고 하면 아실 것 같다. 그 작품이 SBS에서 한창 나오던 시절의 나는 3~4살에 불과 했으니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나이대이다. 그보다는 뒤에 나온 AG(여주인공이 봄이), DP(여주인공이 빛나)가 나에게 더 익숙하다.
내 기억 속에 포켓몬보다 더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로봇 애니메이션이다. 선가드, K캅스, 다간, 골드런 등등 로봇이 변신하고 합체하는 애니메이션을 정말 좋아했다. 이 애니메이션들은 일본의 제작사 선라이즈와 완구 회사 타카라가 협업하여 만든 용자 시리즈의 작품이었다.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또봇, 카봇의 아버지뻘 되는 애니메이션들이다.
용자 시리즈는 9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말로 더빙되어 한국에서도 많은 어린이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97년 가오가이거를 마지막으로 어른의 사정으로 제작이 중단되었고 한국에서 역시 90년대 말을 기점으로 인기가 시들시들해졌다. 사실 내가 6~7살이던 00년대 초반은 이미 로봇 애니메이션의 전성기가 지나버린 시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티비를 통해 본 적이 없었고 대부분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보았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엄마에게 받은 천원 지폐를 들고 신나게 비디오 가게에 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 중에 한창 인기를 끌던 시기를 지나 뒤늦게 한국 방송에서 소개된 작품이 하나 있었다. ‘용자지령 다그온’이었다. 96년 나온 작품이었는데 이전의 용자 시리즈 작품과 조금 다른 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대개 용자 시리즈는 로봇과 소년이 등장하여 교감을 나누는 구조를 이룬다. 하지만 다그온은 고등학생이 나와서 다그온으로 변신하여 직접 로봇이 되는 형식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파워레인저’ 느낌의 작품이었다. 등장인물의 나이대가 달랐던 만큼 어린아이들이 보는 작품이면서도 청춘물의 느낌까지 풍겼다. 이 때문에 독특한 작품성을 갖고 다양한 시청층에게 반응을 얻었지만 일본에서의 시청률은 조금 저조했다고 들었다.
다른 작품에 비해 덜 인기를 끌었던 탓인지 한국에는 늦게 들어왔고 내가 일곱 살이던 2002년경 SBS를 통해 ‘로봇용사 다그온’이라는 이름으로 방영하기 시작했다. 내가 용자 시리즈를 알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다그온이 할 시간이 되면 꼬박꼬박 TV 앞으로 갔다. 엄마를 졸라서 주인공이 변신하던 슈퍼 화이어 다그온도 샀고 ‘트라이 다그온!’이라고 외치며 변신하는 놀이도 가끔 즐겼다. 02년 월드컵 때문인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지 못해서 사람들은 잘 모르는 작품이 되었지만 내 기억에는 또렷이 남아 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는 다그온을 비롯한 용자 시리즈를 좋아한다. 모든 작품을 외장하드에 보관해두고 틈틈이 보고 있다. 이런 내 취향을 보고 부모님은 아직도 애처럼 논다고 투덜거리신다. 그러나 나에게 용자 시리즈는 추억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 로봇들을 보며 나도 세상이 필요로 하는 멋진 영웅이 되기를 바랐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런 영웅이 되는 상상과 내 현실은 몇 광년쯤 떨어져 있었고 현실에서 다그온 같은 로봇을 만날 가능성도 0에 가깝다.
현실성 없고 유치한 애니메이션이지만 다시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설레고 힘이 느껴진다. 아마 용자 시리즈 특유의 긍정적인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용자 시리즈는 용기가 있다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가 보기에 다소 심각하고 진지한 이야기도 담겨 있지만 영웅은 포기하지 않고 용기의 힘으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일어선다. 그 희망찬 분위기가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용기의 마법은 내 마음에 울림을 남기고 있다. 지치고 힘들 때면 멋진 로봇을 보며 추억을 떠올리고 일상을 견디는 힘을 얻는다.
내 MP3에는 다그온의 오프닝과 엔딩이 담겨 있다. 하늘이 맑게 개인 날이면 푸르른 나무가 잘 보이는 벤치에 앉는 것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그때마다 다그온의 노래를 자주 듣는다. 올해 내 모습은 다그온은커녕 1회만에 스쳐 지나가는 악당만도 못할 만큼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전 같은 의욕도 열정도 내 마음에서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다그온의 노래를 들을 때면 조금이나마 힘이 난다. 애니메이션을 즐겁게 보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행복을 느끼기 때문일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다그온이 되어서 사람들을 구하는 마법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인생에 한 번쯤 누군가 마음속에 멋진 영웅으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다. 지금의 부족한 내 모습도 그곳에 이르는 과정이길 바라는 마음이다.